헌터의 이야기
2017.11.17 01:41

붉고 선명한, 아마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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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날의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기록을 남깁니다.

그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각오를 갖고 싸울 수 있게 해준,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과의 첫 만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태운 버스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아니... 당신은 찾아왔습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과, 눈빛을 읽을 수 없는 새카만 선글라스. 전신을 감싼 검정.

기가 세 보이는 사람.

그것이 당신에 대한 첫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위험한 존재였고, 나는 그런 당신을 믿을 수 없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당신은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 정체 모를 흡혈귀.

그것이 당신.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단 걸 알면서도, 당신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미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피를 무척 두려워했습니다.

나의 피는, 말로도 글로도 미처 옮길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단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볼 때마다, 그는 분노조차 할 수 없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나는 나의 존재가 그의 슬픔 그 자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그의 삶이며, 그에게 남은 모든 것이며, 그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며,

동시에 그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도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 이룬 모든 희생은, 분명 나를 사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바랐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미워해줬으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두려워했으면, 경멸했으면, 증오해줬으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으니 살아줬으면 했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죽기보다, 나와 함께 살아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었단 걸,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 안에 남은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목숨을 써서 이룰 것을 정해둔 것입니다.

그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나를 위해 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요.

그 선택이, 나의 존재였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아닌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흐르는 혈계의 피를,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 앞에 나타난, 내가 부정하고 싶은 모든 것 그 자체였던 당신은, 내게 있어서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의 상상과는 다른 존재였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에, 변덕쟁이에, 의중을 읽을 수 없고, 허무주의적이면서도, 이따금 슬픈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나는 그 눈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눈은 이미 죽은 자의 눈이었습니다.

살아가기보다 목숨을 쓰기로 마음먹은, 그와 같은 눈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아끼지 않게 된 자의 눈이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쓰러뜨려야할 흡혈귀로 볼 수 없었고, 망설이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내게 가혹한 위협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내게 분노를 심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알게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에, 변덕쟁이에, 의중을 읽을 수 없고, 허무주의적이면서도, 이따금 슬픈 눈을 하는, 외톨이.

당신은 그와 마찬가지로 남겨져버린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이 아마도, 당신의 슬픔.

아마도 당신의 동기였을 겁니다.

 

우리는 짧고 덧없는 시간 밖에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나는 당신과 무척 긴 시간을 보낸 듯한 착각이 듭니다.

당신은 마지막 질문에서야 겨우, 거짓말을 그만둬주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당신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조금은 다른 형태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단 걸,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두려워했고, 당신을 알고 싶었고, 당신을 싫어했고, 그리고 당신을 조금 좋아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나의 대답이었습니다.

 

 

 

당신의 심장을 태우면서도, 나는 여전히 죄악감에 물들었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각오였습니다.

 

 

 

찾던 것은 찾아냈나요?’

 

그 질문에 당신이 허탈한 웃음으로 답한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냉정하게 되짚을 시간을 얻은 지금이라면, 당신에게 좀 더 전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언제까지고, 후회하게 되겠지요.

 

그때마다 당신을 기억하며, 후회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단 것을 배워가겠습니다.

 

싸우는 이유를, 언제까지고 고민하며, 언젠가 답을 내게 되더라도.

 

나는 이 목숨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내일은 느지막이 뜬 해가 조용히, 따스하게 비출 겁니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했던, 그리고 당신을 지켜봐준 그들을 위해 꽃을 준비합니다.

 

 

 

당신처럼 붉고 선명한, 아마릴리스의 꽃을....

 

-20XX/MM/DD

 

새벽의 별을 헤며...

 


사실 은세윤이라는 캐릭터를 짜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이 '자기애의 결여'였습니다.

세윤이라는 인물은 거기서 시작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 기점이 된 건 가족(아버지)와의 생활을 통해 쌓였던 스트레스가, 혈계능력발현(각성)으로 폭발한 것.

자기자신/자신의 안에 흐르는에 대한 미움과 함께, 아버지를 슬프게 만들고 있던 게 자신이었다는 깨달음.

 

각성과 동시에 세윤의 육체적 성장은 멈춥니다.

담피르의 이 육체적인 특성을 통해, 세윤이의 성장이 이 시점에서 어느 정도 정체되어버렸단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번 세션에서 뱀파이어, 그것도 인간성을 가진 뱀파이어가 나왔을 때

이 세션을 통해 세윤이의 자기애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는 RP에 집착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하나...

어영부영 넘어가긴 했는데, 세윤이는 자신이 담피르라는 사실 자체도 극구 숨기고 있었으니까 말이죠. 혈계능력의 사용도 꺼리고 있었고....

 

물론 너무 감추기만 하면 캐릭터가 나서기 어려우니, 캐릭터의 연기는 어디까지나 캐릭터라는 걸로 >_<

 

사실 저런 자기애의 결여라면 타자로부터 독립/분리되고 싶다는 갈망도 생각해봤습니다만

세윤이의 경우 자신에 대한 미움, 거기서 비롯되는 분노가 에너지로 변환되는 게 아니라

슬픔으로 바뀌면서 도리어 에너지를 깎아버리는 거죠.

세션 중에 J의 행태가 우울증에 비견되기도 했는데, 세윤이도 꽤 비슷합니다.

세윤이는 따지자면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라서, 언제나 스스로 다 할 수 있으려고 하고,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렇지만 무언가를 해낼 힘은 남지 않은 악순환.

 

다행히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세윤이는 조금이나마 앞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러한 작은 성장은 간단히 뒤엎어지거나, 부정당할수도 있지만...

슬픔에 가라앉아있기보다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세윤이가 조금이나마 이해했기를 빕니다.

 

-오늘도 좋은 플레이를 준비해주신 GM님과, 함께 해주신 PL분들께 감사인사를 남기며...

 

  • profile
    title: (GC) N-맨크로우™ 2017.11.17 20:44
    저승의 J "어……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는데……" @무안

    세윤이가 한 걸음 더 나아갔군요. 이런 거 좋아합니다 >ㅅ<
  • profile
    리포 2017.11.17 22:48
    감사합니다 (つ ' /// '⊂) 부끄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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